“와, 되게 높다. 언제 올라가지?”
문경 고모산성의 높은 성벽을 올려다보며 처음 든 생각이었습니다. 막상 올라가 보니 힘들다는 생각보다 먼저 영강과 주변 길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왜 옛사람들은 굳이 이 높은 곳에 성을 쌓았을까. 또 왜 영강 옆 가파른 절벽을 깎아 토끼비리 같은 길을 냈을까.
처음에는 오래된 성벽과 토끼비리를 직접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런데 하나씩 이유를 찾아보니 고모산성과 토끼비리는 따로 떨어진 유적이 아니었습니다.
산과 영강 사이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을 지키기 위해 위에는 성을 쌓았고, 그 길을 지나기 위해 아래에서는 벼랑을 깎았습니다.

1. 왜 고모산성은 이곳에 세워졌을까
고모산성은 신라가 5세기 무렵 문경 지역에 진출한 뒤 쌓은 거점 성곽으로, 전체 둘레가 약 1,300m입니다. 한강 유역으로 향하는 길목을 확보하고 북쪽 세력의 남하에 대응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한 성이었습니다.
진남문에서 오른쪽 성벽을 따라 정상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사진으로 볼 때는 그 높이가 크게 실감 나지 않았는데, 막상 위에 서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잠깐 어질어질할 정도였습니다.

저 멀리 영강이 보이고 산과 강 사이로 길이 이어지는 모습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정상에서도 영강과 진남교반, 산과 강 사이의 길목을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도로나 주변 지형이 옛날과 완전히 같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직접 그 높이에 서보면 왜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자리였는지는 어느 정도 감이 옵니다.
이 길은 남쪽 영남에서 북쪽으로 이어지고, 문경새재를 넘어 충청도와 한양 방향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결국 고모산성은 단순히 전망이 좋은 곳에 세운 성이 아니라, 사람과 군대가 오가는 길목을 위에서 살피고 지키기 위한 자리였던 셈입니다.
성벽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는 칡덩굴이 계단 쪽까지 뻗어 나온 곳도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워낙 빠르게 자라는 식물이라 관리를 하고 있어도 몇몇 구간에서는 발밑을 조금 더 살펴야 했습니다. 크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려갈 때는 서두르지 않는 게 좋습니다.

2. 1.3km 성벽은 왜 산을 따라 이어졌을까
약 1.3km에 이르는 성벽을 직접 따라 걸어보니 숫자로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습니다.
성벽은 평지에 반듯하게 선을 그은 것처럼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산의 높낮이를 따라 올라갔다 내려가며 이어집니다. 높은 계단을 오르고 뒤를 돌아보면 조금 전 지나온 성벽이 산비탈 아래로 길게 내려다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성을 쌓을 때도 산을 억지로 평평하게 만들기보다 원래의 높은 지형과 경사를 방어에 이용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긴 성벽도 결국 돌 하나하나가 모여 만들어진 것이지요. 이 높은 곳까지 돌을 옮기고 산의 경사에 맞춰 쌓아 올렸을 사람들의 손도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제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돌의 크기보다 성벽과 산이 따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산의 지형 자체가 성의 일부가 된 듯했습니다.
3. 토끼비리, 왜 영강 벼랑에 길을 냈을까
고모산성에서 내려오면 문경 토끼비리가 이어집니다.
한쪽에는 산이 바짝 붙어 있고 다른 쪽에는 영강과 벼랑이 이어지는 좁은 옛길입니다. 바위 절벽을 사람이 직접 깎아 길을 낸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직접 걸어보니 궁금했습니다.
왜 굳이 이런 벼랑에 길을 냈을까.
이 길은 남쪽 영남에서 북쪽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중요한 통로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산과 영강이 맞닿아 넓은 평지를 확보하기 어려워도, 사람과 물자가 오가려면 결국 이 길목을 지나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강 옆의 벼랑을 깎아 사람이 지날 길을 만들었습니다.
옛 기록에서는 이 길을 관갑천잔도라고도 불렀습니다. 흔히 떠올리는 나무 잔도와는 달리 이곳에는 바위 절벽 자체를 파고 깎아 길을 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고모산성과 토끼비리를 함께 보고 나니 두 곳의 관계도 선명해졌습니다.
위에서는 길을 지키기 위해 돌을 쌓았고, 아래에서는 그 길을 지나가기 위해 바위를 깎았습니다.
토끼비리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으로 향하다 길을 찾지 못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지나갈 길을 찾았다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4. 토끼비리를 오갔던 사람들
이 길에는 군사와 관리만 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 장사를 위해 이동하던 상인과 보부상, 그리고 이름조차 남지 않은 수많은 길손도 이 길을 오갔습니다.
고모산성 입구에는 돌고개 성황당과 돌탑, 옛 주막거리도 남아 있습니다. 지나던 상인과 보부상들이 쉬어가던 흔적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저는 여행 삼아 천천히 걷지만, 오래전 사람들에게 이 길은 가지 않아도 되는 여행길이 아니라 가야만 하는 삶의 길이었을 겁니다.
토끼비리를 걷다가 문득 생각했습니다.
그들도 지금의 나처럼 이 영강을 바라봤을까.
바라보는 마음은 달랐겠지만 같은 산을 지나고 같은 강을 끼고 같은 길 위에 발을 올렸다는 사실이 오래전 사람들의 시간을 조금 가까이 느끼게 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이곳저곳 살펴보니 남편이 옆에서 한마디 했습니다.
"이렇게 다니니 좋지?”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습니다. 블로그 덕분에 그냥 지나칠 곳도 한 번 더 보고, 궁금한 것도 생겼습니다.
방문 전 알아둘 점
고모산성 정상으로 올라가는 성벽길에는 오르막과 높은 계단이 있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한여름이라 정상까지 올라가는 동안 땀이 꽤 많이 났습니다.
- 위치: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일원
- 미끄럽지 않은 운동화나 트레킹화가 좋습니다.
- 여름에는 물과 모자를 챙기는 편이 좋습니다.
- 정상은 생각보다 높아 가장자리에서는 조심해서 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 토끼비리는 좁은 벼랑길 구간이 있어 걷다가 사진을 찍을 때는 잠시 멈추는 편이 안전합니다.
- 주차는 무료, 화장실은 주차장 근처에 있었습니다.
마무리
고모산성과 토끼비리는 가까이 이어져 있어 한 번에 함께 둘러보기 좋습니다.
고모산성과 토끼비리를 처음 걸었을 때는 높은 성벽과 영강 풍경, 벼랑을 따라 이어지는 옛길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다녀온 뒤 왜 이곳에 성을 세웠는지, 왜 영강 옆 벼랑까지 깎아 길을 냈는지 하나씩 궁금증을 풀어보니 그때 보았던 풍경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고모산성은 길을 지키기 위해 세운 성이었고, 토끼비리는 그 길을 지나기 위해 만든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지금 제가 다시 걷고 있습니다.
문경의 오래된 역사는 그렇게 연도와 사건보다 산과 영강,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갔던 사람들의 흔적으로 더 오래 남았습니다.
고모산성으로 오기 전에는 가까운 봉생정과 봉생마을도 함께 둘러봤습니다.
▶ 문경 봉생정과 봉생마을, 500살 우물과 400살 나무를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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