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에는 남편 일정 때문에 함께 내려왔습니다. 처음부터 계획한 여행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영강 주변이나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진남교반과 고모산성이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문경에 도착하던 첫날부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이어졌습니다.
산 위로 길게 이어진 고모산성 성벽의 불빛이 궁금해 차를 돌렸고, 진남교반 야경까지 구경하다 보니 숙소에는 밤 10시가 넘어서 도착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기다려주신 펜션 사장님이 다음 날 아침 한 가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일찍 일어나시면 오른쪽 데크계단으로 올라가 보세요. 유적지가 있어요. 내려올 때는 반대편으로 내려오시고요.”
그 말 한마디 덕분에 뜻밖의 아침 산책이 시작됐습니다.
1. 숙소 옆 계단을 올라 만난 문경 봉생정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나왔습니다.
숙소 오른쪽으로 10m 남짓 걸어 데크계단을 따라 잠깐 올라갔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정자가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봉생정(鳳笙亭)이었습니다.
봉생정은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영강과 조령천이 만나는 일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경시 문화관광에서도 진남교반 권역에 봉생정·고모산성·토끼비리를 함께 소개하고 있어 주변 문경 문화유적과 연계해 둘러보기 좋은 곳입니다.

입구에는 표지석이 있었고 한쪽에는 전통적인 모습으로 만든 작은 화장실도 마련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올라갔을 때 출입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밖에서만 보고 내려가야 하나 싶던 순간 할머니 두 분이 올라오셨습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왜 이렇게 일찍 왔슈?”
인사를 나누는 사이 할머니들이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여기 들어가도 돼요?”
“그럼요. 들어오는 곳이에요.”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봉생정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2. 서애 류성룡의 흔적과 영강이 보이는 정자
봉생정은 서애 류성룡과 인연이 있는 정자입니다. 류성룡이 하회와 한양을 오갈 때 이곳에 들러 쉬었다고 전해지며, 1583년에 정자가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봉생정에 서면 영강과 조령천, 독산 일대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역사 설명보다 먼저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주변 풍경이었습니다.
담장을 따라 천천히 한 바퀴 돌았습니다. 담장은 어른이 서서 바라보면 그 너머로 영강과 주변 산세가 보일 정도의 높이였고, 한쪽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정자를 지키듯 서 있었습니다.

요즘 소나무 병이 많다는 이야기를 접하다 보니 그 나무도 괜히 오래 바라보게 됐습니다. 저희도 정원에 심은 소나무를 치료하고 예방 관리한 경험이 있어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습니다.
자갈이 깔린 바닥은 잡초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말끔했습니다. 담장 아래에서는 이름 모를 꽃대가 잎도 없이 쭉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밟지 마. 꽃 있어.”
남편에게 말하며 조심해서 걸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할머니 두 분은 작은 돌 사이에 난 풀을 하나씩 뽑고 계셨습니다. 제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풀인데 할머니들 눈에는 금방 보이는 모양이었습니다.
“약을 좀 뿌리시면 편하지 않으세요?”
제가 말하자 남편이 제 귀에 대고 작게 한마디 했습니다.
“그러면 저분들 일자리 없어져.”
아하.
듣고 보니 그럴 것 같았습니다.
수백 년 된 문화유적이 저절로 이렇게 말끔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는 아침부터 올라와 풀을 뽑고 주변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숙소에서 걸어 올라왔지만 봉생정 주변에는 차량을 세울 만한 공간도 비교적 넉넉해 보였습니다. 다만 별도로 표시된 봉생정 전용 주차장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3. 반대편으로 내려가니 봉생마을이 나타났다
봉생정을 다 둘러본 뒤에는 펜션 사장님 말씀대로 올라왔던 길이 아닌 반대편으로 내려갔습니다.
“내려올 때는 반대로 내려오세요.”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완만한 길을 30~40m 정도 내려가자 작은 봉생마을이 나타났습니다.

마을에 접어들자 또 고민했습니다.
“오른쪽으로 가야 돼? 왼쪽으로 가야 돼?”
오른쪽으로 잠깐 들어가 보니 산기슭을 따라 집 몇 채가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다시 돌아나와 마을 쪽으로 걸었습니다.
그러자 담장마다 봉황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왜 여기에는 봉황이 이렇게 많지?”
그때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처음부터 전설을 알고 들어간 마을이 아니라서 오히려 재미있었습니다. 봉황을 볼 때마다 궁금증 하나를 품고 골목을 따라 계속 걸었습니다.
4. 황담요와 봉생샘을 지나 찾은 봉황의 이유
마을을 걷다가 황담요라는 이름을 만났습니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문이 열려 있지 않아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지나치고 나니 오히려 궁금증이 더 남았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찾아봤습니다.
알고 보니 황담요는 김억주 도예가의 공간이었고, 김억주 도예가는 2017년 문경시가 처음 선정한 도자기 명장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황담요를 운영하며 문경 전통 도자문화를 이어온 도예가였습니다.
“아, 그래서 그냥 작은 공방이 아니었구나.”
문이 열려 있었다면 우리는 분명 들어갔을 겁니다. 저는 그림이나 도자기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봉생마을을 떠올리면 황담요가 함께 생각나곤 합니다.
골목을 조금 더 걸으니 기와지붕 아래 오래된 봉생샘과 나무가 나타났습니다.
현장에서 본 표현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우물 500살, 나무 400살.’
봉생샘은 상수도가 생기기 전 주민들이 식수원으로 이용했던 오래된 공동 샘으로 전해집니다.

수백 년 전에도 누군가는 아침이면 이 길을 걸어 내려와 물을 길었을 겁니다. 집은 몇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인데 그 안에 쌓인 시간은 참 길었습니다.
봉황이 그려진 담장을 따라 조금 더 걸었더니 마침내 봉황 세 마리 형상과 마을 안내가 나타났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아, 그래서 온 마을에 봉황이 있었구나.”
봉생마을에는 오래전 대나무숲에서 봉황 세 마리가 날아올랐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는 봉생이라는 마을 이름과 마을 곳곳에 남은 봉황의 흔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설명을 읽고 걸었다면 담장의 봉황을 별생각 없이 지나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봉황이지?”
궁금해하며 걷다가 마지막에 답을 알게 되니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5. 짧은 아침 산책인데 자꾸 생각나는 봉생마을
봉황 이야기를 확인한 곳에서 10m 남짓 더 걸으니 다시 숙소가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영강 주변이나 조금 걷자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숙소 옆 계단 하나를 올라갔다가 문경의 문화유적 봉생정을 만나고, 정자를 가꾸는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반대편으로 내려가 봉생마을과 오래된 우물, 봉황 전설까지 만났습니다.
그야말로 횡재한 아침 산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행이 끝난 뒤에도 이상하게 봉생마을은 자꾸 생각납니다.
아마 이른 시간이라 들어가 보지 못했던 황담요도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다 본 것 같은데 하나를 남겨두고 온 기분.
다음에 문경을 다시 찾는다면 이번에는 황담요 문 안쪽까지 천천히 둘러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아침 산책을 마친 뒤 우리는 전날 밤부터 궁금했던 산 위의 성벽을 직접 찾아 올라갔습니다.
그곳이 바로 고모산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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